(의정부의 땅이름 유래-27) 흥선역(興宣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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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 유래-27) 흥선역(興宣驛)
  • 김추윤
  • 승인 2015.12.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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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이학박사, 신한대 중앙도서관장


의정부시 가능동에는 경전철역에 흥선역(興宣驛)이 있다. 갑자기 흥선대원군의 이름이 붙은 역사명이 있어서 특이하다. 어째서 흥선대원군의 이름이 의정부에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의정부시 가능3동 사무소옆 은혜유치원 자리에 직곡산장이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 년전에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세력에 밀려 정계를 은퇴하고 한동안 이곳에서 칩거생활을 한다.

옛날에는 산장 주위에 송림이 울창하고 앞에 흐르는 백석천(白石川)이 옥수같이 맑고 깨끗해서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하나, 지금은 소나무도 옥수도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십수여년 전까지만 해도 산장에 대원군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산장도 향나무도 또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으니, 아쉽다. 역사의 현장은 사라졌어도 그 연유를 품은 지명은 아직 살아있다. 그러나 이곳 산장을 지나는 직동길은 흥선로라 하고, 흥선지하도, 흥선로타리 라는 명칭이 명명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2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박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된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는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받아들였다.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삼국간섭 이후 친러노선을 취하게 되는 민씨와 친러정객의 득세로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권은 약화되었다.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만회하고자 정치 낭인들과 일본병을 동원해 궁중을 습격하였다.

이때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입궐의 명색을 꾸미기 위해 은거 중이던 그를 받들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를 살해하였다. 일본은 친일내각을 세우고 대원군의 위세를 빌려 만행을 은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기민한 반격으로 국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단행되고 곧바로 친러정부가 들어서자, 대원군은 양주목의 곧은골(直谷;현 의정부 가능동)로 돌아와 다시 은거하였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더불어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세도정치를 분쇄해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경복궁 중수의 강행과 더불어 천주교도 박해는 그의 정치생명에 타격을 주었다.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에 흥미를 가지고 천주교도와의 제휴를 꾀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정적들에게 이용되어 정치적 생명을 위협받게 될 것을 염려한 그는 천주교도 박해령을 내려 전후 6년간(1866∼1872)에 걸쳐 8,000여 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대박해를 감행하였다.

프랑스의 천주교도 학살을 구실로 침공을 시도한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을 구실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의 군사적 도전을 강력한 지도력으로 극복하였다.

이것으로 일단 구미 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을 극복했으나, 쇄국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조선왕조의 세계사와의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지연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서화에도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요즈음 조선의 무당 딸로 태어난 도리화가 진채선이 17세의 나이로 고창의 초갑부인 신재효의 눈에 띄어 제자로 있다가 경북궁 낙성식 때 한양으로 올라가 출중한 기예를 선보여 흥선대원군의 애첩이 되어 총애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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