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상태바
이인좌의 난
  • 한북신문
  • 승인 2026.01.27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문화원 양주학연구소장)
홍정덕 논설주간(양주문화원 양주학연구소장)

숙종의 후사를 둘러싼 논란은 경종 즉위 후에도 여전히 지속 되었다.

경종은 숙종의 유일한 적장이었지만 그의 모친 희빈 장씨가 사사되면서 그는 죄인의 아들이 되어 왕위 계승의 흠결이 생겼고 자칫 그가 연산군처럼 모친 장씨의 죽음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물으려 하면 그 후 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희빈을 죽음으로 몰아간 정치적 배후인 노론에게는 단순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한편 노론이 지지해 온 연잉군 역시 왕위 계승자로서는 만만치 않은 흠결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잉군은 서출인데다 그 모친 숙빈도 역시 궁녀로서는 가장 낮은 무수리 출신인데다가 희빈의 폐출 및 죽음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소론, 남인과 노론은 경종 즉위 후에도 치열한 정쟁을 전개한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노론에서 후계자를 세울 것을 주장하여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는데 이에서 더 나가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강권하자 이에 격분한 경종은 소론의 지지 아래 이를 역모로 규정하고 노론을 공격하여 주도자들인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을 유배하였다가 사사한다.

문제는 경종의 허약한 건강상태였다. 재위 4년(1724) 8월2일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며 위독해지기 시작했다. 8월20일 연잉군이 올린 게장과 생감을 저녁으로 먹고는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다가 24일 의관 이공윤의 반대에도 연잉군의 고집으로 인삼차를 복용한 후 결국 승하하고 말았다.

연잉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소론과 남인은 연잉군을 형 경종을 죽인 죄인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반란사태를 야기한다.

영조 4년(1728) 이인좌는 충청도에서 거병하여 청주성을 점령하였고 호남에서는 박필현이 전라감사 정시효와 협력하여 전주성으로 진격하고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7만의 군세로 합천, 함양 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론 오명항, 박문수 등이 이인좌 군을 안성에서 저지하면서 반란세가 꺾이면서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은 혹독한 댓가를 치른다.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자. 즉결 처분자를 제외하고도 영조의 친국 아래 반란과 연계되었다고 혐의를 받은 사람 291명이 체포되어 159명이 혹형이나 물고로 죽어 나갔다. 모두가 다 소론 남인들이었다.

이른바 노론 일당 세상이 도래한 것이었다. 고종 연간의 관료를 분석하면 노론이 83%, 소론 12%, 북인 3%, 남인은 2%에 불과하다.

국왕 견제 기능과 정책 협의는 실종되고 당론의 폐해만 온 조정에 가득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대항해 시대가 열리며 시민이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대변혁의 시기에 오직 조선은 공리공론, 계급모순, 자기 폐쇄의 허망에 빠지며 망국, 몰락의 길로 내달아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일당의 정국 장악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이다.


주요기사